김연욱 기자
최순정 인턴기자
'태아산재보상법' 시행 2년, 여전히 굳게 닫힌 아빠의 문.
과학은 '부계 유해성'을 말하는데 법은 '모체 성별'만 묻는다.
■ 기획의 시작: 어느 반도체 노동자 가정이 보내온 눈물의 편지
20여 년간 산업재해와 현장의 그늘을 취재하며 수많은 비극을 목격했다. 수십 년간 항암 방사선을 온몸으로 맞으며 일하다 기형아를 출산한 간호사의 눈물을 닦아주었고, 반도체 공장의 유독물질 속에서 일하다 자폐아를 낳은 여성 노동자의 폐부를 찔러 결국 대법원으로부터'태아산재'를 인정받는 현장에도 기자는 함께 있었다.
당시 법원의 판결은 위대해 보였다. "태아는 모체와 한 몸"이기에 엄마의 산재는 곧 아이의 산재라는 논리였다. 2024년, 마침내'태아산재보상법(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이 본격 시행되면서 우리 사회는 마침내 일터의 독성이 미래 세대에게 대물림되는 비극을 끊어내는 듯했다.
그러나2026년 오늘, 기자의 책상 위에 놓인 한 통의 진정서는 그 법이 얼마나 반쪽짜리였는지를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글로벌1위를 자부하는 첨단 반도체 공장에서 수년간 클린룸을 지키며 유기용제와 화학물질을 다뤄온 남성 노동자A씨. 그의 아내는 전업주부다. 부부에게 찾아온 첫 아이는 선천성 장기 기형을 안고 태어났다. 가정을 덮친 비극 앞에A씨는 동료 여성 노동자들이 그랬듯 태아산재를 신청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과 법의 답변은 차가웠다. "산모 당사자가 아닌 아빠의 직업병은 태아산재로 인정할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 엄마가 일하다 아이가 아프면 산재지만, 아빠가 일하다 아이가 아프면'운이 없거나 유전 탓'이라는 불합리한 선언이었다.
■ 반도체 공장의 화려한 이름 뒤에 숨겨진'독성의 칵테일'
반도체 산업은 대한민국 경제의 버팀목이지만, 그 이면은 온갖 유해 화학물질이 뒤섞인'독성의 칵테일' 룸이다. 벤젠, 비소, 에틸렌글리콜에테르 등 이름조차 생소한 생식독성 물질들이 매일같이 사용된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이 독성이 여성의'자궁'과'난자'에 미치는 영향에만 주목해 왔다. 하지만 과학계의 정설은 이미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남성의 정자는 끊임없이 분열하고 생성되는 세포다. 반도체 공장의 유해 물질은 남성 노동자의DNA를 파괴하고 정자의 질을 변형시킨다. 변형된 정자로 수정된 태아는 염색체 이상, 선천성 기형, 발달 장애를 겪을 확률이 극도로 높아진다. 이는 추측이 아닌 의학적 사실이다.
법원은 과거 여성 반도체 노동자의 태아산재를 인정할 때"인과관계를 명확히 규명하기 어렵더라도, 유해 환경에 지속해서 노출되었다면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그런데 왜 이 전향적인 논리가'아빠'라는 성별 앞에서는 멈춰 서는가. 아빠의 정자가 오염되어 태어난 아이의 고통은, 엄마의 태반을 통해 유입된 독성보다 가볍단 말인가.
■ 법의 치명적인 헛점과 모순:
'모체 중심주의'에 갇힌 태아산재법
현행 태아산재보상법의 가장 큰 모순은
**'임신 중인 근로자가 업무상 유해인자에 노출되어 출산한 자녀'**로 대상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는 점이다.
법 조문 자체가 아빠의 존재를 완전히 지워버린 것이다.
여기서 치명적인 법적 헛점과 모순이 발생한다.
첫째, '부계(父系) 유해성'의 과학적 몰이해: 법은 여전히 임신과 출산을 여성만의 영역으로 본다. 남성의 생식 독성이 태아에게 미치는 영향(부계 효과)을 법안 설계 당시부터 철저히 외면한 결과다.
둘째, 형평성의 상실: 똑같은 반도체 공장 라인에서, 똑같은 유기용제를 마시며 나란히 일한 남녀 노동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두 사람이 각각 다른 배우자를 만나 아이를 낳았는데 둘 다 기형아가 태어났다면, 여성 노동자의 아이는 국가가 치료비를 대주고 남성 노동자의 아이는 집을 팔아 치료비를 감당해야 한다. 이 얼마나 기괴한 모순인가.
셋째, 유전의 굴레라는 낙인: 아빠의 산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그 책임을 개인의'유전적 결함'으로 돌리는 행위다. 일터에서 몸을 바쳐 일한 대가가 자식에게 대물림된 것도 모자라, 국가로부터'네 유전자 문제'라는 낙인까지 찍히는 이중의 형벌이다.
■ 향후 과제:
'부모 산재'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20년 전, 간호사의 방사선 태아산재를 취재할 때도 병원 측은 "개인의 체질 문제"라고 일축했었다. 반도체 여성 노동자의 자폐아 산재 때도 기업은 "인과관계가 없다"며 버텼다. 지금 아빠의 태아산재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 역시, 과거 우리가 깨부수었던 그 나태한 행정 편의주의와 다를 바 없다.
이 비극을 멈추기 위해 정치를 비롯한 우리 사회는 즉각적인 법 개정에 나서야 한다.
태아산재법의 주어를 '임신 중인 여성 근로자'에서 '근로자(부모 모두 포함)'로 개정해야 한다. 노동자의 성별과 관계없이 생식독성 물질에 노출된 일터가 원인이라면 그 자녀를 보호해야 한다.
역학조사 방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남성 노동자의 근무 환경과 자녀의 선천성 질환 간의 통계적 유의성을 추적하는 대대적인 조사가 공단 차원에서 실행되어야 한다.
입증 책임을 노동자가 아닌 기업과 국가가 지도록 해야 한다. 첨단 산업이라는 미명 하에 영업비밀로 감춰진 화학물질의 유해성을 노동자 개인이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 기자의 눈:
아기의 질병은 국가의 책임이다
태아산재는 단순히 노동자 개인에 대한 보상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의 미래인 아이들이 일터의 탐욕과 방치 속에서 어떤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에 대한 극명한 성적표다.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을 걱정하면서, 국가를 위해 일터에서 땀 흘린 아빠 때문에 아프게 태어난 아이를 "엄마가 일 안 했으니 산재가 아니다"라며 내치는 국가는 존재할 자격이 없다.
아이는 아빠의 일터를 선택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아빠의 정자를 오염시킨 반도체 공장의 이윤 뒤에는 국가의 묵인이 있었다면, 그 아기의 치료와 삶은 국가가 책임지는 것이 마땅하다. 법의 문구 뒤에 숨어 이 잔인한 차별을 방치하는 근로복지공단과 입법부의 각성을 촉구한다. 엄마의 일터든 아빠의 일터든, 일터는 아이에게 죄가 될 수 없다.